한국에서의 아나키

일레븐 그린스톤즈(redeleven@angelfire.com) 씀

한국에서 아나키즘은 섹스 피스톨즈가 영국에서 거둔 것과 같은 커다란 성공을 거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섹스 피스톨즈의 성공에 공헌을 한 비비언 웨스트우드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아마도 한국에 비비언 웨스트우드가 없기에 아나키스트 운동의 현실적 역사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내가 중국에서 빈털터리인 채로 6개월 전 한국에 왔다가 잠시 머무르고 돌아가는 뉴질랜드 인이기 제대로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내 한국어 실력이 "아줌마, 맛있는 귤 1킬로에 얼마예요?"밖에 하지 못하는 기초적인 수준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한국에 오기 전에 이미 인터넷을 통해 한국의 아나키스트들과 접촉을 했고, 나보다 미리 한국에 와있던 한 친구는 어딜 가면 아나키스트를 만날 수 있고, 누굴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되는지 내게 미리 알려주었다. 아마도 이유는 다른 곳에 있을 지도 모른다.

먼저, 아나키즘 사상이 처음 동양에 소개된 1906년 이후 아나키즘 사상이나 활동은 연속적이지 못했다. 고토쿠 슈스이라는 친구가 6개월 간의 미국 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주변의 다양한 분파의 사회주의자 친구들에게 자신의 믿음과 정치적/철학적 사상에 변화가 있었다고 말해 그 친구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아나코 코뮤니즘과 생디칼리즘이 혼합되어 있었던 그는 당대에 인기 있던 아나키스트 텍스트들을 일본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고토쿠 슈스이가 돌아와 번역을 하면서 서양의 사상들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파리에서 일하며 공부하던 중국 유학생들과 토쿄에 피난 와있던 중국인 지식인들의 도움도 작용했다.

한국에서는 일본이 마수를 뻗치기 전까지는 아나키즘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한국은 공식적으로 일본에 1910년에 합병되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의 결과로 한국 아나키즘의 주요 목표는 일본 제국주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맞춰지게 되었다. 이 목표는 만주나 일본에 살던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에게도 짙은 명암을 드리웠다. 그들은 상호부조와 노동자 자주관리의 경제체제를 건설하기 위해 조직화 작업을 했으나 그 대부분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었다. 이 초창기 시절에서 1990년대 좀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기까지 아나키스트들은 제국주의 군대와 군사 독재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혹독한 탄압을 받았으며, 일부는 대중 운동을 포기하는 대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은 서로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며 지내긴 했지만 다른 실천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한국의 아나키 운동사를 알아내기 힘들었던 또 다른 이유는 많은 아나키스트들의 저작이 그 사람이 일제에 대항해 싸웠는가, 그리고 싸웠다면 어떤 이유로 일제에 대항했는가를 중요시하는 현재의 입장에 따라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23년에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한 신채호의 경우 역사는 그를 민족주의자로 기록하고 있다.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들이 서대문 형무소(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 역 부근에 있으며 오후에 견학하기에는 불편하다)에 투옥되어 고문을 당했는데도 우리는 그들이 아나키스트가 아니라 '의사'라거나 '커다란 성공을 거둔 애국적 투사들'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아나키스트와는 완전히 다르다.

마지막으로 수많은 아나키스트들이 민족주의자들 및 공산주의자들과 더불어 민족해방 투쟁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럴 때 '비(非)아나키적'인 활동을 같이 벌인 경우 누가 민족주의자고 누가 아나키스트인지 구별하기란 복잡해진다.

약간만 살펴보자. 1919년 중국 상해에서 "혁명적 당파들과 사회주의적 당파들의 민족 연합 전선"(하기락, A history of the Korean anarchist movement, 1986, 112쪽)에 의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들 중에는 조선혁명자연맹의 유자명과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의 유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나중에 한국 아나키스트인 하기락에 의해 다음과 같이 합리화되었다. "...'통치하지 않는 정부.' 무정부라는 것은 무지배, 무착취를 의미한다. 정부라는 것은 예를 들면 독립적인 자율 정부에서처럼 민중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사회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정부와 무정부라는 두 개념은 서로 모순되지 아니한다." (하기락, 1986, 81쪽)

아나키스트들이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권력의 자리에 스스로 올랐다는 것, 그리고 통치하는 것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모순되는 주장으로 그것을 합리화시키는 것은 교묘히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알기로 이것은 권력 분산이라는 아나키적 개념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하기락의 이런 주장보다는 조지 우드콕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더 동조할 것이다.

(중략)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소련 군대가 지금은 북한이 되어버린 곳에서 패배한 일본 군대를 공격했다. 9월이 되어 미국 군대가 도착했는데 소련이 확장 정책을 펴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약간 화가 난 상태였다. 당시는 좌파들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강도 일본(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은 전쟁에서 패해 퇴각하고 있었고, 일제의 사회적, 경제적 약탈 이후 폐허가 된 속에서도 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울 가능성이 보였다.

약 60명 가량의 아나키스트들이 종로에서 모여 '자유사회건설자연맹'과 '농촌자치연맹' '노동자자치연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새로이 해방된 상황에서 선택 가능한 조건들을 탐구하며 민중들을 교육시키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독립과 상호부조 사회를 위해 어떻게 공동체를 건설할 것이며 사회적 조직을 만들 것인가 논의했다.

물론 이 당시 식민체제가 끝난 후의 가능성들에 관한 선전 활동을 벌인 것은 아나키스트들만은 아니었다. 모두가 나름대로의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이 북쪽에 바로 다가와 있는 상황에서 농민들에게 자신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다고 약속하며 공산주의 국가의 이상을 받아드리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개인적으로 귀국했다. 왜냐하면 미국 군대가 정부라는 공식적 지위를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림은 개인적 권력이 대단했으며, 경륜과 학식이 풍부해 존경을 받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신생 독립국의 나아갈 바를 그에게 질문했다. 그는 어떤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한국(조선)에서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는 '무정부'와 동의어로 사용되어온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 학자들이 '아나키즘'을 잘못 번역한 것이다. 실제로는 아나키즘의 'an-'은 '없음 또는 無'를 뜻하고 'archi-'는 '우두머리나 주인 즉 강제적 권력'을 뜻한다. 그러므로 아나키는 '강제적 권력 또는 지배가 없는 것'을 뜻한다. 나는 강제적 권력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이지만 자율적 정부까지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자는 아니다. 아나키스트가 거부하는 정부란 오직 타율적인 정부인 것이다.(하기락, 1986, 122쪽)"

유림의 이 주장은 다수의 아나키스트 이론가 집단들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더욱 정교한 이론적 주장을 펼칠 것이고, 물론 동시에 실천에 대해서도 논쟁을 벌이겠지만 아나키즘의 기본적 원칙 중 하나는 그 형태가 어떻든 간에 정부는 강압적이며 개인과 공동체의 자율성을 쉽사리 포기한다는 것이다.

어떤 아나키스트들이든 (물론 타율적 정부에 반대한다는 아나키스트는 아니겠지만) 모든 권력이 분산되기 전에는 권력은 민중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어떤 권력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자 다른 무리들(이 경우에는 소련, 영국 그리고 미국)이 들어와 한반도를 자원이 풍부한 북한과 농업이 발달한 남한으로 분단하고,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며, 나아가 사회를 재건설하기 위한 민중들의 노력을 무위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협상을 벌였다. 이 시기는 한국(조선)이 더 이상 일본의 식민지배 하에 놓여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해방'되었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최소한 현재 한국의 내 아나키스트 친구(매닉)는 이것을 해방이라고 보지 않는다. 일본을 대신해 미군의 점령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동안 좌익과 우익 단체들은 서로간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아나키스트들이 사용한 방법이 극단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여겼다. 처음엔 아나키스트들의 일본 제국주의 반대 입장을 지지하던 우익들도 나중에 가서는 아나키스트들을 장애물로 여기게 되었다. 이 국가가 분단되었을 때 많은 좌익들은 북쪽의 사회주의 국가로 갔고, 이들이 남한에서 떠남으로 인해 민족주의자들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렇게 강화된 입지를 바탕으로 우익이 지배하는 남한에 남기로 결정한 아나키스트들에게는 더욱 심한 압력이 가해지게 되었다.

1946년 4월 '자유사회건설자연맹' '조선아나키스트총연맹' '흑우연맹' 그리고 '진우연맹' 소속의 아나키스트들은 경상남도 안의에 모였다. 이 회의에서 동요하는 국제정세와 더욱 긴박하게 돌아가던 국내정세에 대한 토론이 오갔다.

1910년 조선을 합병한 이후 일본은 조선의 자원을 수탈해 자신의 경제적 요구를 위해 사용하고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았으며 조선인이 지배하거나 소유하고 있는 산업은 심각하게 지체되었다. (존 크럼프, "동아시아에서의 아나키즘과 민족주의", Anarchist Studies, 1996, Vol 4, No 1) 재정, 무역, 교통, 행정 및 생산의 기반이 되는 대부분의 하부구조가 일본 식민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갔으며, 이들의 인구는 전체 3%에 불과했다. 이 회의에서 사회를 재건설하는데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무엇을 할 것이며,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화두에 매달렸다. 당시 상황에 대한 이들의 대응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떻게 이들은 자신들이 정한 "인간의 자유"와 "평화 수호"라는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만장일치로 생각할 수 있었을까?(하기락, 1986, 144쪽)

"우리는 해방된 조국을 위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하기락, 1986, 13쪽)

현재의 운동진영으로부터 그리고 외부로부터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 내부의 개혁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경향에 대해 많은 비판이 제기되어왔다. 존 크럼프는 자신의 "동아시아에서의 아나키즘과 민족주의" 논문에서 아나키즘이 이렇게 특이하게 해석되게된 이유를 살핀다.

"한국에서의 아나키즘은 민족주의에 의해 침윤되어온 정도로 볼 때 주목할 만하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오랫동안 기존의 정치권과 연계를 맺을 태세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한국 아나키즘의 이러한 특이성은 직접적으로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계속된 일본의 식민지배와 이후 이어진 분단에서 연유하는 것 같다."(45쪽)

크럼프는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남아있던 '제3세계' 한국에서 권력의 분산과 지방 자치라는 아나키즘의 원칙은 일제가 아니라 억압받는 민중이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민족주의자들의 주장과 쉽사리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로 퇴화될"(크럼프, 1996, 45쪽)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식민지 국가들에서 그리 강한 역사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크럼프는 만약 식민지 국가들에서 강력한 아나키즘의 역사가 있었다면 아나키즘이 민족주의에 굴복하는 경우가 아마도 많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민족주의란 제국주의 권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 민중에 의한 민족주의이다. 즉 식민지 민중들이 종속에서 해방되기 위한 열망을 말하는 것이며, 자신의 권력 구조를 확장하려는 민족 국가의 열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구별이 매우 중요하다. 아나키즘의 기본 주장을 양보하려 했던 것은 아마도 민중들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려는 희망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절박한 조치들이었을 것이다. 민중들이 권력을 추구하려 했던 것은 아마도 앞으로의 의사 결정을 내리는데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유일한 통로가 아니었을까.

1946년 안의 회의 참가자들은 현재 아나키 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와 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정당 정치에 대해 참여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원칙이 더 넓은 집단의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선택은 위계적이고 강압적인 조직 내부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념적으로 타협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되 주변화되는 것인가?

틀림없이 보다 지배적인 경향이 정당 정치에 참여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었던 반면에 정치적 조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조직을 만들기 위해 활발한 활동을 했던 운동도 있었다.

내가 서울에서 알고 지낸 덕망있는 노년 아나키스트인 내 친구 이문창 씨는 이런 운동에 관여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한의원에서 일하던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고향을 방문한 다음 서울로 올라와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을 키워갔다. 이문창 씨가 말한 바, 당시 서울은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새로운 사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들뜬 도시였다. 사람들은 사회를 다시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탐구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공중회합들이 조직되었고 이문창 씨는 이러한 시대적 기회를 적절히 이용했다. 그는 여러 사람들을 만났는데, 이 중 그가 매우 존경하게 된 한 분은 이문창 씨에게 아나키즘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이문창 씨는 정치가가 되기보다는 풀푸리 사회운동에 참여하고픈 강한 열망을 느꼈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농촌 자원활동가 연합"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1960년 4월에 학생들이 이승만에 대항해 궐기했고, 그들의 교수들도 이 운동에 동참했다. 학생들은 이 교수들을 매우 존경했고, 자신들의 활동을 평가하면서 교수들에게 '이젠 어떤 활 3동을 해야 하죠?'라고 질문했다. 이 아나키스트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촌에서 살고 있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토지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들은 학생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당시의 체제에 대한 대안을 농민들에게 교육시키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교수들은 그 당시 산업은 거의 발달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학생들이 경공업 활동에 종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한 집단에서 지역 공동체 작업장을 건설하고 방직 제조공업에 기계를 도입할 것을 요구하고 기술을 연마했다.

이문창 씨는 연락대표자로서 학생들 사이에 연락을 담당했다. 그는 서울에서 지내다 주말이면 지방으로 내려갔으며 다른 사람들은 지방에서 살고 있었다. "농촌 자원활동가 연합"의 한가지 목표는 물건을 제조해 도시에 팔며 경제적으로 독립된 농촌 마을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분명 이들은 크로포트킨의 "전원, 농장 그리고 작업장," 러시아의 나로드니키, 마흐노주의자, 두루티가 스페인 내전 기간에 벌였던 활동 같은 종류에 영향을 받았고,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이에 동참했다. 그러나 이들의 담론은 완전히 아나키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그들이 정부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를 했던 것도 아니었다(매닉).

아마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당시의 군사적/정치적 탄압이 아나키스트들과 다른 활동가들에게 가해졌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개인적인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신념을 절대 굽히지 않아야 한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도 이런 선택을 해야 할 시대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이승만의 독재 체제가 바로 그런 시대였다.

1961년부터 1980년까지의 군사독재 시절 동안 남한은 중공업 발전에 박차를 가했고 사람들은 고전적인 산업 발전에서 나타나는 "도시 이주" 분위기에 편승해 도시로 몰려듦에 따라 농촌 마을 건설 체제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학생들의 영향력 또한 붕괴되고 말았다. 물론 이 시절에 자행된 압제에 대한 저항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자유 시장을 부르짖는 것이었다. [현 대통령] "김대중은 압제에 반대해 인권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지만 똑같은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원합니다.(으흠)" 한국의 새로운 아나키스트 세대는 1990년대에 들어와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인터넷 문화가 확산된 이후에야 나타났다. "우리의 입에 물려있던 재갈이 풀린 것이다."

이 한국의 새로운 아나키스트들은 선배 세대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견지한다. 이 중 두드러진 한국의 젊은 아나키스트 조약골은 선배 세대 아나키스트들이 처해 있던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비판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편다.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당시 한국의 독특한 상황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민족주의적인 방법 이외에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어요. 일제 식민지 기간에 그들이 했던 행동을 비판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행동이 선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주의가 다 나쁜 것은 아니죠(조약골)."

그는 현 사회에서 우리가 싸우고 있는 자본주의와 만연해 있는 민족주의에 대해 그림을 그려 유추관계를 설명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와 타협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왜 너희들은 자본주의와 타협을 했지?'라고 우리에게 반문하겠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존재조건인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존재조건인 것처럼 당시 사람들에게 민족주의는 존재조건이었던 것입니다."

조약골의 주장은 그럴 듯 하다. 우리는 어쩔 수없이 자본주의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그 정도가 많건 적건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 아나키스트들은 시장 경제에 참가하지 않거나, 더 적게 소비하거나, 다국적 기업의 물건을 사지 말자고 선전하는 방법 등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본주의의 굴레 하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은 우리가 자본주의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작년에 한국에 와서 여러 아나키 활동에 참가했던 내 친구 피오나는 이 유추가 정확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유추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아요. 내가 보기에 한국에서 민족주의의 주요한 동력은 여러 해 동안 제국주의자들이 모든 방면에서 한국을 말아먹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민족주의/ 민족자결은 낭만적으로 묘사되며, 투쟁의 목표가 되는 것이겠죠.

반면에 자본주의 하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타협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면 공산주의와 파시스트 독재 체제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서로 광범위한 지지를 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항해 싸웠던 아나키스트들에게 이러한 유추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자이기도 했던 반(反)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일할 수도 있었어요. 로렌조 콤보아 어빈 Lorenzo Kom'boa Ervin은 아나키즘과 민족해방 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아나키스트들은 민족해방 운동이 식민주의 혹은 제국주의 권력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한 민족해방 운동을 지지한다."(55쪽)"

그렇다면 한국의 아나키스트 민족주의자들은 어쩔 수없이 민족주의와 타협했고 기존의 정치적 전략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가?

글쎄, 위에서 살펴본 하기락이나 유림의 진술에 의하면 그들은 '타협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쩔 수없이 기존 정치권에 참여했다거나 '조국'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국가의 자유를 위해 힘을 쏟았던 것이지 사회의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표는 분명히 지역에 기초한 자율적(한국어에 유의할 것) 정부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정부야말로 자신들의 소망이었던 자율성, 민주주의 그리고 단결을 실현시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기존 정당 정치권에 참여하는 것이 '최대의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에 참여했던 것이다.(유림, 하기락의 책 122쪽에서 재인용)

(중략)

우리가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노년의 아나키스트에게 영향을 받은 몇몇 요즘 사람들은 한국에서 아나키 운동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그것은 모두 민족주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운동에 대해 별로 관심도 갖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의지를 갖고 알아보려고 하지만 이것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왜냐하면 먼저 물어볼 만한 사람이 거의 없을 뿐더러 과거의 운동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도 않았고, 어느새 노년이 된 반(反)제국주의자들은 이젠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의 아나키스트 역사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1945년 이후 아나키스트 활동은 없었고, 활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모두 민족주의 운동에 흡수되어 버렸죠. 나는 이 역사를 탐구해보고 싶지만 그럴 만한 토대가 없습니다."(매닉)

내가 보기에 젊은 세대들은 한국의 아나키스트 운동의 역사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는 것 같다. 이렇게된 부분적 이유는 젊은 아나키스트들과 늙은 아나키스트들 사이에 세대차이가 있다는 것과 늙은 아나키스트들이 체득한 통찰과 지혜, 경험은 현 한국의 상황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특히 나이든 사람들은 식민지 시절을 경험하고 몸소 겪어보았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서양 문화의 국제화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제국주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나이든 아나키스트들만이 전수해줄 수 있는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해요. 그들에겐 서있을 자리가 없어요."(이문창)

이 말의 참뜻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뉴질랜드의 마오리 족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 'turangawaewae'를 언급하고는 그 단어에 대해 설명했다. 이 단어는 당신이 굳건히 서있는 어떤 장소를 지칭하는데, 물리적인 뜻과 형이상학적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고 그것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당신의 위치가 어떻든 이것은 더욱 강한 것이다. 과연 이문창 씨가 이런 뜻으로 말을 한 것이었을까?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봤어요."

자본이 세계화되면 그에 반대하는 반(反)문화 역시 세계화되는 법이다. 운동이 활발하지 않은 조그만 국가에서는 미국과 유럽을 바라보며 그것을 낭만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위험이 존재한다. 즉 '시애틀이나 프라하에서 벌였던 그들의 활동은 얼마나 대단했고 감동적이었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어떤 운동은 세계화에 반대하는 전세계적 운동을 살펴보며 그 전술과 철학을 무작정 따라하기도 한다. 그것을 올바르게 분석해보지도 않거나 심지어 그와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데 말이다. 서양의 지배적인 문화가 세계화되는 '지배문화 신식민주의'에 대처하는 방법을 이해하기가 서양의 반(反)문화가 세계화되는 '반문화 신식민주의'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보다 쉬운데도 말이다.

이로써 한국의 요즘 젊은 아나키스트들이 운동해온 방식이 어째서 체계적이지 못하고 뒤죽박죽인가 약간은 설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들은 그동안 이것에 반대한다, 저것에 반대한다 등을 외치며 많은 실천을 해왔고, 길거리 공연을 했으며,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기획도 없었고, 한 문제에 집중하지도 않았으며, 분석을 하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젊은이들은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분명히 연대는 있었지만 단결은 없었다. 어떤 이들은 운동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각자의 문제를 갖고 함께 모이는 풀뿌리 운동을 믿습니다."(매닉)

매닉은 단순히 아나키즘의 깃발 아래 함께 모여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공동의 관심사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모여 일을 하려고 한다.

"아나키즘은 대학 시장이나 펑크 록이 유행하는 곳에서 쉽사리 문화적 현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문화 시장에서 아나키즘을 전유해왔죠."

이런 생각을 갖게 되거나 단결이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이들이 조직화의 주요한 수단으로 인터넷을 사용하는데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인터넷 사용은 엄청난 수준으로서 심지어는 모든 젊은이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너무 오랫동안 게임을 하고 사이버 공간에서 채팅을 하는데 몰두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다. 인터넷은 물론 의견을 교환하고 전세계적인 교류를 해나가는데 매우 유용하다.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국제아나키스트동맹(International Anarchist League(IAL), http://anarclan.net으로 가면 된다)은 한국에서 그리고 세계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이 교류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개인적인 교류가 부족한 단체에서 나타나는 기능 장애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는 지속적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IAL이 이제 무슨 이메일 리스트로 생각할 정도가 되었어요."(조약골)

과거에 IAL은 온라인으로 회원들을 조직하면 실천 행동이 있기 바로 전에 직접 만나보고는 행동이 끝나면 뿔뿔이 흩어지곤 했다. 분석을 하거나 개인적으로 그 실천들을 논의해볼 가능성조차 없었다. 이것은 일부 젊은 세대를 사이에서 개인주의가 얼마나 널리 퍼져있는가를 반영하며 그들의 실천행동 중심주의적 가치관을 드러낸다. 이런 가치관은 내가 다른 나라들의 몇몇 현장에서 경험한 것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보통 정보는 많이 갖고 있지 않지만 열정만은 넘치는 젊은이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 사이의 이분법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나이든 아나키스트들은 실천이 부족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더욱 학술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운동을 완전히 새로 시작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세대간 차이와 지나간 운동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전에는 이들의 조직 활동은 매우 느슨한 수준이었지만 이제 이들은 새로운 각오로 오프라인 상설 조직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이들은 앞으로 활동에서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

"내가 보기에 한국에서의 아나키즘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한국에는 전투적 노동운동이 매우 강력한 편이며 이것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훌륭한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조약골)

한국 사회는 매우 위계적이다. 나이에서, 성별 그리고 학력 수준까지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서열화되어 있다.

"한국인들은 위계질서를 매우 당연하게 여기는데, 아나키스트로서 나는 이런 것이 쓰레기라고 생각합니다."(조약골)

이런 심각한 사회화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보자면 그는 이제 막 출발선에 서있는 셈이라고 생각한다. 아나키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며, 배운 지식을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사용하기 위해서 말이다.

조약골은 진보적인 좌익 단체들과 함께 일하는 데 관심을 보인다. 특히 한국의 모든 젊은 남자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군대에 반대하는 운동을 진행하는데 이들과 함께 하려는 것이다. 경찰이 군대반대운동 홈페이지 (http://non-serviam.org)의 논의를 차단하고 참여자들을 조사했을 때 평화와 인권 운동, 민주노동당 그리고 동성애자인권연대 등의 단체들이 연대해 이 문제를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토론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국에서 혁명적인 일을 하려면 진보적 좌익 단체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조약골)

남성들에 대한 강제적 병역제도는 회사에서 여성에 대한 완고한 편견을 고착시킨다. 26개월을 군대에서 보낸 남성은 가산점을 받거나 호봉에 반영되는 곧 그 도움을 받는다. 이밖에도 회사에서 군필 남성에게 주는 많은 이익들은 여성은 절대로 받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IAL의 아나키적 페미니스트들은 이 문제를 바라본다.

"내가 아나키즘이라는 문에 들어서게 된 것은 가난한 여성들, 그리고 남성이나 정부 또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눌려온 여성들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관심이 있어요."(매닉)

국제연대를 위한 자유학교는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또 다른 프로젝트이다. 자유학교의 목적은 가르치면 동시에 공부하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열린 교육을 제공하며 가능하다면 한국의 완고한 전통적인 유교 중심의 교육 방법을 허물길 바란다. 자유학교는 펑크 록 가사를 통해 배우는 영어와 한국의 인권 상황 등 다양한 방면에서 수업을 한다. 이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열성적으로 노력했다. 처음 자유학교를 시작할 때부터 언어 장벽의 문제부터 집단의 동학(動學) 그리고 공동 의사결정 과정들에 대해 논의가 이뤄졌다. 새로운 수업과 나아갈 방향을 공동으로 숙고하고 자유학교를 원활히 운영하기 위해 매주 모여 회의를 한다.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go.to/freeschool)

"한국의 교육 체계는 완전히 잘못되어 있으며, 지극히 소수의 잘난 사람들 중심입니다. 돈이 없으면 교육을 받을 수도 없어요."(조약골)

교육을 받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정부가 학생들이 배울 내용을 모두 결정한다. 자유학교는 개방적인 교육 내용과 무료 교육을 제공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주제를 선정해 학습하도록 장려한다. 이로써 국가에서 장악하고 있는 교육, 부자들만을 위한 교육에 직접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다.

이문창 씨가 오랫동안 일해온 '민중문화연구소'는 자유학교에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연구소는 '국민문화연구소'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 명칭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아나키즘의 기본 사상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일까? 아니면 계속되는 독재 체제 하에서 아나키즘의 사상을 보존시키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일까?

지금은 은퇴한 이문창 씨가 갖고 있는 소망 중 하나는 젊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며 자유학교를 통해 이 소망이 어느 정도는 이뤄졌다. 이문창 씨는 또한 한국 아나키스트 역사에 대해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을 공유하고 싶어한다. 이 지식은 절대적으로 올바른 설명이라기보다는 역사에 대한 이문창 씨의 개인적 관점이다. 이것을 통해 이문창 씨는 젊은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turangawaewae를 찾을 수 있도록 독려하려는 것이다. 한국 아나키즘의 역사를 이해하고 이로부터 전진할 수 있도록 말이다. 또한 그는 나이든 아나키스트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젊은이들에 비하면 보다 학술적이랄 수 있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유행하는 투쟁들을 그저 답습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초창기 활동들과는 달리 군대반대 운동과 자유학교 운동은 한국의 상황에 보다 깊이 뿌리박고 있다. 내가 이야기를 나눈 모든 이들은 지금이야말로 이 운동을 확대할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더 많은 친구가 필요합니다. 특히 한국인 친구들 말이에요. 지금까지는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이 각자 주어진 역할을 맡을 필요가 있습니다. 난 '조직'이라는 단어에 질렸습니다. 좌파들은 이 단어를 너무 남용했어요."(매닉)

"난 아나키스트 적인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조직이 만들어진다면 참가할 생각입니다."(으흠)

현재의 아나키스트들은 선배들보다 더 자유롭게 아나키 관련 담론에 참여한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민족주의에 대한 회의조차 품는 것이 낯설 지경이다. 예를 들어 강제적인 군대 복무의 필요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확산된 요즘 활동가들에 대한 탄압은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다. 활동가들은 전 세계적 운동으로부터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있으며, 한국의 상황에 맞는 지침을 전수받을 필요성도 없다.

한국의 운동은 아직 미약한 상태이며 널리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 때문에 과거 선배 아나키스트들과 다른 조그만 나라들의 아나키스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은 비아나키스트 활동가들과도 연대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강력한 노동조합들과 협력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고 페미니즘의 싹을 틔워나가는 것이 한국의 보다 넓은 진보진영에 아나키 운동의 발판을 마련하는 길이 될 것이다.

한국의 젊은 아나키스트들이 아나키 운동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때 한국 사회에 대한 보다 정치한 분석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 말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모두 철이 더 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전에 선배들이 한국에서 그리고 세계적으로 벌여온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방치해버렸던 모든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현재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들 나름의 활동 계획을 세워 이를 추진하려 하고 있으며, 각자의 turangawaewae를 찾고, 나아가 풀뿌리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펼쳐지는 아나키 운동과 손을 맞잡으려 한다.

조약골(anarclan@yahoo.com) 번역